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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414-439) 5. 다섯 번째 적극적 표지 : 진리에 대한 깊은 확신(414-439) -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Truly 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a reasonable and spiritual conviction of the judgment, of the reality and certainty of divine things). 앞서 살펴 본 넷째 표지가 새로운 감각(new sense)의 지적인 또는 이해의 측면을 강조했다면, 다섯째 표지는 확신의 요소를 강조한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확신이 있는 영혼으로부터 거룩한 신앙감정이 우러나온다. 그는 은혜 받은 사람들은 모두 복음의 진리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 더보기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216-220)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216-220) - 신앙감정들이 성경 본문을 마음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진정으로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It is no sign that religious affections are truly holy and spiritual, or that they are not, that they come with texts of Scripture, remarkably brought to the mind). 에드워즈 당시에 성경 말씀이 마음속에 떠올려짐으로써 감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은혜로 말미암은 감정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입장이 있고, 반대로 감정이 성경 말씀이 성경 말씀이 생각남과 .. 더보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제2장 3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강설(19-1)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제2장 3항)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은 성경에서 각각 진리로 고백하고 받기 때문”제2장 3항: “신성이 단일한 가운데, 본질과 능력과 영원함이 동일하신 세 위격들이 계시니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다른 어떤 분에게서 나시거나 나오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게서 영원 안에서 나오셨다.” 본 항목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삼위일체임을 고백합니다. 거룩한 삼위일체의 고백은 두 가지 내용을 담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신성이 단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는 또한 세 위격들.. 더보기
스위스 일치신조와 개혁파 스콜라주의 스위스 일치신조와 개혁파 스콜라주의 이은선(안양대 목회학과)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이 진행되는 동안에 루터파, 개혁파, 로마 카톨릭을 비롯하여 각 진영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한 많은 신앙고백서들이 작성되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데 관심을 두었으나, 로마 카톨릭이 1563년 트렌트 종교회의를 통하여 트렌트 신조를 작성한 후에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논쟁이 격화되었다. 로마 카톨릭이 트렌트 신조를 통하여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한 후에 벨라르민(Robert Bellarmine, 1542-1621)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개신교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개신교 안에서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개혁파 진영 안에서도 논쟁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개혁파 진영도 이.. 더보기
도르트 신경의 예정론에 관련한 이해 도르트 신경의 예정론에 관련한 이해 (김병훈, 합신, 조직신학) 1. 들어가는 말 2. 예정에 관련한 항론파의 주장 3.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알미니우스의 견해 4. 예정과 관련한 도르트 총회의 결정 5. 하나님의 작정, 지식 그리고 의지에 관한 개혁파의 견해 6.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 1618-19년에 있었던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가 알미니우스의 교훈을 따랐던 항론파들의 견해를 잘못된 것으로 결정한 이후에, 소위 말하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패커(J. I. Packer)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어느 한 편에 서는 일을 피할 수가 없을” 정도로 서로 대척을 이루는 별개의 신학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롭게도, 셀(.. 더보기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목회와 신학, 2000,11월호) 성령님과 교회 공동체(목회와 신학, 2000,11월호) 유해무 한국교회는 교회사에서 전무후무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국이 동양의 4대 용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한국교회도 이런 성장으로 인하여 세계교회의 이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세계를 순방하면서 개척교회가 서울에서만 하루에 하나 또는 두 개씩 세워진다고 간증을 할 때 세계교회는 열광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성장을 내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불과 30여년간의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이 땅에서 부흥이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성장에서부터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비록 성장이 멈추었다 하더라도, 그간 한국교회가 축적한 저력은 대단히 크다. 우리는.. 더보기
개혁 신학의 성찬론 개혁 신학의 성찬론 김병훈 교수 들어가는 말 개혁 신학에 있어서의 성찬론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신학 토론의 상황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화체설’(transubstantiation)로 지칭이 되는 천주교회의 성찬론을 성경에 따른 바른 교리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찬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는 개신교와 천주교회가 교회론적 분리를 겪게 되는 하나의 이유로 작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찬론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자들 상호간에도 일치를 보지 못하여 교회의 구조와 예배의 이해를 서로 달리하는 분열의 이유로도 작용을 하였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있어서의 성찬론의 논쟁은 신앙과 경건에 있어서 성찬 의식이 단지 부차적이며 종속적인 역할만을 감당하는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회의 .. 더보기
예정,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0) 예정,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0) 우리의 현주소 ‘예정’은 과거 70~80년대에 그랬던 것만큼 자주 거론되는 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도의 책임과 관련하여, ‘예정’이 언급된 성경 구절의 해석이나 적용과 관련하여, 또 교파 간의 차이―특히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와 관련하여, 이 주제를 간과할 수가 없다. 특히 성경을 어느 정도 깊이 있게 살피는 이들, 교리 공부를 통해 궁금증을 갖게 된 이들, 그리고 인과론(因果論, causation/causality)이나 인간의 자유의지 등 철학적 주제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로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주제는―다른 모든 신학적 이슈가 그렇듯 ―궁극적으로 인간의 합리적 이해나 설명.. 더보기
피터 마스터스가 정리한 청교도의 아버지 윌리엄 퍼킨스의 중생개념 중생개념은 칼빈주의자들에게 정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황금사슬: 혹은, 신학적 서술: 구원과 저주의 원인의 순서를 포함하여]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 Containing the Order of the Causes of Salvation and Damnation에서 퍼킨스는 회심을 여러 가지 부분 혹은 단계로 나눴다. 이것이 죄에 대한 확신 이후에 중생된다는 입장을 채택한 청교도들 가운데서 일종의 표준적인 견해가 되었다. 마스터스는 중생이 먼저 있은 후 죄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는 입장이지만 중생이 회심의 과정에 있어서 한 요소를 차지 한다는 퍼킨스의 견해에는 동의한다. 퍼킨스는 중생 이전과 이후가 모두 하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다.. 더보기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 박아론 교수 종말론에 대한 소위 『세기말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그 절정에 달한 듯한 느낌을 받는 이 때에 각종 잘못된 『세기말적 종말론』에 대한 비판들이 속출하고 있으나 막상 그 내용들을 읽어보면 『유행을 좇아가며』고정 관념과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보편적 이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또 이것이 오늘날 『종말론의 페허』가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움마저 우리에게 안겨다 준다. 그런고로 우리가 오늘날 모두 알고 소유하기를 원하는바 「성경적 종말론」에 대한 바르고 균형잡힌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필자는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필자가 맡은바 이 주제에 대하여 (1) 철학과 종교에 있어서의 종말사상과 (2) 교회사에 있어서의 종말론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