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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이 회화는은 네덜란드의 미술가 페테르 브레헬의 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른쪽 상단의 교회를 중심으로 오른편은 사순절을, 왼쪽 상단의 여관을 중심으로 왼편은 사육제를 묘사하고 있다. 오른쪽 하단의 붉은 수레를 탄 수녀는 기다란 막대 위에 청어 두 마리를 올려두고 있다. 이는 사순절의 상징으로 청어는 차가운 기운 때문에 사람의 육욕을 억제한다는 미신이 있었다. 그래서 사순절 기간에 청어를 먹었다. 수레 위에는 프레첼도 돟여 있는데 이는 흔히 사제들이 가슴에 양손을 어긋맞춰 어깨 위에 올린 포즈를 형상화한 것으로 순종의 상징으로 밀가루 반죽에 소슴간을 하거나 아무 간없이 만든 과자로 사순절 기간 먹었다. 왼쪽 하단에는 술통을.. 더보기
루불료플의 삼위일체 러시아 화가 안드레이 루불료플의 삼위일체 그림의 왼쪽이 성부 가운데가 성자, 오른쪽이 성령이다. 성부와 성령의 라인을 아래까지 이어보면 잔의 형상을 하고 있고 성자는 거기 담겨 있다. 이는 성자의 고난과 희생을 상징한다. 동방교회는 이콘이 발달했는데 이 작품은 대표적인 이콘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이 이콘을 그린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자기가 묵상한 것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안한 가운데 살면서도 늘 마음을 하느님 안에 모으고 사는 길을 동료 수도자들에게 제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거룩한 모습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볼수록 장식품이나 교리의 보조해설을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가 머물기 위한 거룩한 장소로 그.. 더보기
쇼펜하우어와 그 영향력 쇼펜하우어가 인기라는데 사는 게 고통스런 시대라는 소릴 꺼다.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지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때문에 우울증을 평생 삼하게 앓았다. 의심과 불안에 시달렸다. 불이 날까봐 2층에선 잠도 자지 못했고 머리맡에는 총을 두었다고 한다.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에 대항해서 같은 시간에 수업을 열었다가 대부분 헤겔 강의로 가서 한 한기 만에 강의를 관둬 버렸다.헤겔을 싫어해서 키우던 강아지를 헤겔이라 불렀다. 그러나 나중에 불교에 심취해서 아트만이라 부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을 칸트의 진정한 계승자로 생각했다. 그의 작품 "의지와 표상"은 칸트의 물 자체와 현상계와 대응한다. 여기서 의지는 개인뿐만 아니라 만물의 욕망 내지 운동성이다. 그것이 우리 의식에 표상하고 그것을 세계라 했다. 쇼펜하우.. 더보기
목회자가 끊어야 할 4가지 논어의 자한편 4장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 직역을 하면 이런 뜻입니다. 공자께서 네 가지를 끊었는데 뜻함도 끊고, 기필함도 끊고, 고집도 끊고 없었으며, 사사로움도 끊고 없더라. 좀 의역을 하자면, 함부로 단정하는 일을 끊고, 자신만 옳다 믿는 일을 끊고 고집부리는 일을 끊고 나를 내세우는 것을 끊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개척 교회 목사들이 생각해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구절을 하나 더 찾아 보겠습니다. 子曰, 貧而無怨難, 富而無驕易. 공자가 이를기를 가난하면서도 원망이 없긴 어렵지만 부유하면서 교만함이 없긴 쉽다. 가진 것이 적으면 원망이 생기기 쉽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가 하는 일의 정당화를 하는 과정을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공자가 끊었다고 하.. 더보기
소크라테스가 철학한 이유 소크라테스는 석공이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아버지 당시 아테네는 페리클래스가 통치하던 시기로 아테네의 전성기로 그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 등 유명한 건물이 건축된 시기였다. 그뿐 아니라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전사자를 위한 비석 등 전쟁 특수를 누렸을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세 번의 3번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여했는데 기원전 431년 펠라티움 전투, 기원전 429년 데리움 전투, 기원전 422년 탄토라 전투에 중갑 보병으로 참여했다. 이는 이 갑옷을 준비할 정도 이상의 소득이 있는 중산층 이상이었다는 뜻이다. 한 전투에서 코를 맞아 코뼈가 주저 앉은 외모였다고 한다. 툭 튀어 나온 눈에 늘 허름한 옷차림이었으나 그의 강철 체력은 유명했다. 맨발로 눈 위를 행군하고도 멀쩡했고 밤새 술을 마시.. 더보기
나의 신앙고백 난 초중학교 시절 한 줄 글도 못썼다. 그렇다고 고교는 뭐 다르냐면 그닥 달라진 게 없었다. 대게 그 나이가 되면 시근이 들어 억지 쓰지 않고 어른들과 상식적 대화가 되는 정도의 나이인데 난 그나마 억지 대장이었다. 다만 달라진 거라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대략 2학년이 끝나갈 무렵 겨울 방학부터였다. 율법 앞에 비참을 이때 즈음 경험했고 소크라테스처럼 내적인 음성을 들은 게 고3 겨울 방학 즈음이었다. 새벽기도를 다니고 있었는데 강력한 양심의 인도가 있었으나 순종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지도해주는 분이 없어 긴 방황을 했다. 결정적 변화는 87년 여름이었다. 나를 묶고 있던 내적 사슬이 끊어지는 체험 후에 내 지성과 글쓰기는 비약적으로 달라져 현재에 이르렀다. 초교 시절.. 더보기
소크라테스의 철학함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해 대화 상대를 아포리아 싱태로 몰고 갔다. 아포리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으로 철학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나 "논리적 모순"을 의미한다. 예컨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놓은 올무, 곧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는 바치라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 내지 참 선지자가 아니라 할테고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자칭 왕이라는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는 자기 지식의 모순을 깨닫게 함으로 참된 지식을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논박술과 산파술로 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지를 깨닫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참된 지식에 이르면 이는 실천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운 후, 1.. 더보기
흄의 마음의 습관 데이비드 흄은 기하학과 수학은 자기 정의에 의해 지식을 만들기에 지식을 증가시키는 학문이 아니라고 했다. 이런 류를 선험 명제내지 분석 명제라고 한다. 1+1이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같은 명제를 선험 명제라 하고 물체는 중력 가속도로 낙하한다외 같은 명제를 우연히 참이 되는 명제라 했다. 왜일까? 진리 같은데 말이다. 흄은 극단적인 회의주의자였다. 모든 물체는 항상 낙하하지만 우리는 모든 물체의 낙하를 경험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연히 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인과관계를 적용하려면 필연이 필요한데 이런 인과관계는 자연을 아무리 관측해도 경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마음의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이 말에 머리를 맞았다. 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 마음의 습관이라는 워딩에서 얻은 아이.. 더보기
흄과 칸트 내가 동양철학 전공했다고 오해하시는 분들이 좀 계셔서 서양철학 소개 포스팅을 좀 하고 있다. 물론 사서삼경을 읽기는 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바가바드 기타도 읽었다. 원래 학부 철학은 동서양 가리지 않는다. 졸업 논문은 비트겐슈타인으로 썼는데 그냥 짜깁기 수준이었다. 어제 칸트가 흄이 인과율의 필연이 마음의 습관이란 주장에 자신의 독단을 깨닫고 순수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 선험적 종합 판단과 그 명제로서 기학 물리 수학이 참된 학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그가 이성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뿐만 아니라 영혼, 지유의지, 우주의 끝, 등도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결국 이성의 한계에 대한 선긋기인 셈이다. 우선 훔이 인과율의 필연이 경험되지 않고 마음의 습관이라 한 .. 더보기
인식론의 이유 근대는 서양철학에서 인식론의 시대이다. 동양은 인식론이 없는데 서양은 어쩌다 인식론의 시대를 열었을까? 인식론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인식론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데카르트의 어거스틴 오마쥬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근대 인식론을 정초한다. 이는 15세기 흑사병의 창궐 이후 르네상스가 가져온 문예부흥이 과학기술의 진보를 낳았고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으로 중세 천년의 과학 천동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부터 실추되기 시작한 교회의 권위는 천동설의 붕괴와 함께 계시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체계화한 계시의 체계로서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 외 다른 방법론을 모색하기 시작.. 더보기